내가 호두를 알게 된 것은 아홉 살 되던 해였던 1975년 10월이였다. 아버지는 도문 철도부문에서 근무하다가 사업의 수요로 왕청현 묘령역으로 전근하셨다. 묘령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였다. 이사 때문에 전학이 늦어져 나는 한 달 동안 집에서 놀아야 했다.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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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두를 알게 된 것은 아홉 살 되던 해였던 1975년 10월이였다. 아버지는 도문 철도부문에서 근무하다가 사업의 수요로 왕청현 묘령역으로 전근하셨다. 묘령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였다. 이사 때문에 전학이 늦어져 나는 한 달 동안 집에서 놀아야 했다.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더보기……
터지던지... 그러면 어머니는 색이 다른 헝겊으로 무릎을 기워 주셨다. 그 기운 바지를 입고 학교를 다니던 나, 그리고 다시 6·1절을 목이 빠지도록 손꼽아 기다리던 나의 모습이였다. 6·1절이 돼야 흰 광목 적삼에 새 곤색 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더보기……
류지서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60여 년 세월이 흘렀다. 내 팔십 인생의 기억 속에 묻힌 많은 추억들이 하나둘 희미해져 가지만 하늘보다 넓은 마음으로 백성을 품고 갈등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며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모범으로 사람을 감화시킨 류지서의 지혜로운 처신은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면서 잊혀지지 않는다. 더보기……
나는 올해 88세 미수(米壽)의 로인이다. 퇴직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되여 간다. 식사 후면 근처 공원에 나가 산책하는 것이 하루의 주요 일과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조선족 소학교가 눈앞에 나타난다. 교문 앞을 지날 때마다 등하교하는 아이들이나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훌륭한 시설에서 마음껏 공부하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누리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더보기……
어린 시절, 철없던 소녀였던 나에게 일요일과 방학은 기다림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왜냐하면 그날이면 우리 네 남매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논밭으로, 겨울에는 땔나무를 하러 산으로... 그렇게 나의 방학은 온전히 ‘일’로 채워졌다. 더보기……
7월의 경박호 부근 조선족마을 폭포촌. 경박호관광지 북문에서 보행으로 10분쯤 가면 조선족 기와지붕이 반갑게 맞아주는 ‘흠명옥농가원’(鑫明玉农家院) 이 보인다. 뒤마당 장독대에서는 주인 지명옥(54)씨가 작년에 담근 된장이 그늘 아래에서 서서히 익어가고 있고 주방에서는 구수한 장국 끓는 냄새가 마을까지 퍼져나간다. 지명옥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마당으로 나와 정겹게 손님을 맞는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 집에 오시면 꼭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습니다.” 더보기……
가끔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나는 쓴 술을 마시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짝을 잃은 비둘기처럼 외로울 때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했던 기나긴 세월, 서로에게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을 만큼 마음이 통하던 그 시간들이 내 삶을 든든하게 채워주고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은 다시 따뜻해진다. 더보기……